2019. 6. 19. 23:25ㆍ읽다/과거와 현재의 대화
한줄평: 세종대왕 그도 완벽하진 못했다. 그리고 문종은 참 아쉽다.
조선왕조실록 3 태종편 내용 정리 https://sagna9250.tistory.com/63 ▶▶▶
음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일단 나라가 강해지려면 학문의 발전이 필수적인 요소이고,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이 정말 중요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세종대왕을 완벽 그 자체 무결점 군주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사대문제와 백성들의 실질적인 생활 개선에 있어선 큰 효과를 못 본 모습을 보며 누구나 완벽할 순 없다는 것을 느꼈다. 흥미진진했고, 이후의 조선 역사 또한 점점 재밌어질 것 같다.
#내용정리
태종이 왕위를 내려놓고 세종이 물려받았지만 태종의 영향력이 막강했음. 즉위 직후 본인의 힘을 보여준 일이 생겼으니.. 바로 강상인 사건! 이후 이 사건을 활용하여 세종의 외척세력을 완전히 짓밟아버림. 여기서 잠깐, 태종이 외척에게 가혹했던 이유는 아마 이것은 계모인 신덕왕후 때문인 것으로 보임.
아무튼 이를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세종. 권력은 오로지 상왕의 것이었고, 세종은 더욱 더 태종의 말을 따름. 그리하여 태종은 권한은 무한하지만 책임은 적고 귀찮은 일은 안하는 상황이 됨. 그러던 중 왜구의 약탈이 벌어짐. 세종이 군사 분야에 미숙함을 보이고 있을 때 태종이 대마도 정벌에 대한 포고령을 내림. 이종무를 필두로 한 조선군은 대마도 정벌에 성공. 하지만 이종무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정벌에는 성공했지만 전투는 패배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짐. 어쨋든 그 결과 100년 가까이 왜구의 횡포에서 자유로워짐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세종의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세상을 뜸. 그 이후 과정에서 세종은 처음으로 태종의 말을 거역했음. 상이 끝나고 태종의 지위는 더욱 더 막강해졌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대비 사망 이후 2년만에 태종 또한 죽음. 이제야 세종의 시대가 열림. 는가 했더니 신하들이 주도권을 가져오려 양녕대군을 들먹이며 딴지를 검.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음.
사실 세종은 태종과 그 신하들로 인해 억울한 상황에 처한 장인, 심온의 사건 재조사 카드로 한 번에 조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정치보복을 싫어하는 성품으로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불이익을 주지 않는 등 대인의 모습을 보임.
P.61 세종은 어렵고 먼 길을 택했다. 피를 부르지 않고 조용하게, 그러나 뚜벅뚜벅 황소걸음으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세종은 태종이 살아있을 때 본인의 오른팔 왼팔을 잘 준비해뒀고(집현전과 황희)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조선을 잘 만들어갔다.(본인이 공부를 엄청 많이 하셨고, 대신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며 잘하심)
하지만, 그런 세종의 역량 밖의 일이 있었으니... 바로 명나라와의 외교. 영락제는 끊임없이 조선에게 요청을 했으며 그가 죽고난 이후 잠시 멈췄다가 선덕제 때 다시 심해졌다. 그렇게 그가 죽고 정통제가 황제에 오를 때까지 비정상적인 사대관계가 이어졌었음. (아주 매우 굴욕적이고 치욕적임)
그래도 외교를 제외하곤 백화만발의 시대라 할 수 있음. 일단 집현전을 중심으로 학문이 융성했고, 생활 전반에 실질적 도움이 됨. 그래서 발달된 분야가...
학문, 출판의 진흥! 이를 통해 통치의 근본을 강화하고 법치를 실현할 수 있었고, 백관과 유생들 교육을 할 수 있었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성 교육이 가능해짐.
과학기술의 도약!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마련했고, 각종 관측기구와 자격루 앙부일구 등 여러 발명품이 만들어짐. (여기서 잠깐, 측우기는 장영실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문종의 세자 때 작품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음) 그리고 화약과 화포기술이 명나라를 앞질로 북방영토 개척에 크게 이바지함.
음악의 재정비! 박연을 필두로 아악을 정리하고 궁중음악을 정비함. 새롭게 악기를 만듬. 여민락, 치화평 등 종묘제례악이 세종의 손에 작곡됨. 정간보 또한 세종이 만듬.
이러한 학문, 과학, 예약 등에 혁신을 일으키며 국방기술에도 관심을 쏟아 '4군 6진'으로 불리는 북방영토 개척에 성공.
세종 즉위 이전부터 압록, 두만강에 조선영토가 그어졌지만, 여진족의 약탈과 잦은 침범으로 방어가 쉽지 않았음. 여진족의 도발에 분노한 세종은 최윤덕 장군을 필두로 공격해 승리. 하지만 이후에도 여진족의 도발이 끊이질 않아 2차 정벌을 했음에도 세조 이래 '4군'은 포기됨.
세종은 최윤덕의 정벌전이 성공하자 두만강 쪽으로 관심을 돌림. 무신 출신이 아닌 김종서를 보냈는데. 6진을 설치하고 옴. 이 과정에서 사민정책을 폈는데. 굉장히 많은 원성을 샀지만 그래도 두만강 남쪽이 실질적으로 조선의 땅이 됨.
훈민정음! 세종이 혼자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유명한 최만리의 상소문을 보고 넘어가자. 그가 상소를 올렸기에 보수 세력의 대표라는 오명을 얻었지만, 사실 그는 집현전 학자이자 실질적인 수장! 아무튼, 세종이 이것을 혼자 만든 것은 아니고 문종, 정의공주, 대군들의 도움이 있었던 듯.
백성을 정말 많이 사랑한 세종.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음. 사민정책과 화폐정책의 실패로 많은 백성들이 고통에 빠짐. 무엇보다도 수령고소금지법으로 백성들은 마지막 보호막까지 잃어버림. 태평성대는 사대부들에게만..
문종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세종과 함께한 인문들을 잠깐 보고 넘어가자. 일단 황희. 이미지와는 달리 청렴과는 거리가 멈. 구설수에 굉장히 많이 올랐고, 자식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국정을 운영하는 능력 하나는 누구보다 뛰어나 오랜 기간 중용.
장영실은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끝이 모호하게 끝났고. 정인지란 인물이 굉장히 과학 발전에 큰 일을 함. 북방의 영웅 최윤덕, 이징옥, 김종서
문종은 그야말로 준비된 왕. 하지만 제위 기간이 짧았고 어린 단종을 두고 죽었음. 비극의 서막.. 단종을 늦게 낳은 이유는 정말 웃기다. 아내 복이 없어 세자빈을 두 번이나 내 쫓았고, 단종을 낳은 세자빈은 출산 후 죽었다.
세종은 말년에 건강 악화로 문종에게 섭정을 맡기며 국정을 운영했으나 그 사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권력의 실세로 올라가게 되었고, 왕비가 죽은 후 세종 또한 죽음.
세종의 죽음 이후 국정운영을 잘했지만 안타깝게도 병이 돋아 어린 아들을 단종을 혼자 두고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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