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문턱에서 죽음을 맞이한 젊은이가 우리에게 남기려 했던 것
성공의 문턱에서 죽음을 맞이한 젊은 의사가 우리에게 남기려 했던 것
만약 내가 지옥 같은 고생 끝에 몇 개월 후면 연봉이 6-7배가 올라가고, 워라벨이 생기며, 본인이 꿈꾸던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지 상상해봤다. 힘들었던 터널을 잘 이겨냈다는 안도감과 희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 터널을 빠져나가 모든 것이 안정될 거라는 생각에 세상 근심 하나 없이 행복할 것이다.
반대로 이런 환상적인 상황에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서른 여섯의 젊은 나이에 0.0012%의 확률로 걸리는 병에 지금까지 해왔던 개고생이 물거품이 되고. 미래의 꿈과 소명을 위해 참고 달려왔던 과거의 시간들이 모조리 쓸모없는 것이 된다면.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이제 곧 100일이 될 아들과 사랑하는 부인, 뭐 하나 제대로 잘해드린 것 없는 부모님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이런 생각조차도 하기 두려운 내게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는 그런 삶과 죽음의 과정을 보여주며 가슴 속 깊은 울림과 가르침을 내게 주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저자가 암 선고를 받기 전 의사가 된 과정과, 암 선고 이후 이것을 이겨내는 모습. 그의 사후에 쓰인 아내의 글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 각각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보통의 죽음에 관한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죽기 때문에 오늘을 살자”, “인생은 유한하기에 정말 소중한 것에 집중하라”와 같은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조금 더 특별한 것을 말이다.
# 미래가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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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4 하지만 내가 들은 목소리는 그와 정 반대였다. “책은 치우고 의학을 공부하라.”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 나는 의학 분야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휘트먼도 의사만이 진정으로 ‘생리적, 영적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이 길은, 책에는 나오지 않는 답을 찾고 전혀 다른 종류의 숭고함을 발견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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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의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문학을 공부했다.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공부하기 위해 문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그런 치열한 공부와 고민 끝에 의학을 선택한 것은, 이후 그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의학을 대하는 태도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나도 요즘 나중에 언젠가 작가가 될 거라는 꿈을 꾸지만, 아직 특별히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임할지 정하지 못했다. 저자가 치열한 고민과 공부로 소명을 얻고, 그 소명의식으로 자신의 길을 택하고 가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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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4 나는 환자의 뇌를 수술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성, 가치관, 무엇이 그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지, 또 얼마나 망가져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수술에 성공하려는 헌신적인 노력에는 큰 대가가 따랐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실패는 참기 힘든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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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수술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런 생각과 태도가 인간관계 전반에서 항상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상대가 내게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한 상태에선 더욱 더 말이다.
도움을 요청한 상대방의 생각과 가치관을 생각하지 않은 채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다보면 그 관계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말, 뼈 때리는 말이더라도 상대에게 그 과정이 충분히 어려울 수 있음을 알려주고 해야 하고. 어느 선에서 그것을 멈췄으면 좋겠는지를 인식하지 않고 쏟아 붇는다면 나와 상대방 모두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다.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관계와 상황 안에서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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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3 기술적인 탁월함이 곧 도덕적 요건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 기술은 정말 많은 게 걸려 있거나, 불과 1~2밀리미터 차이로 비극과 성공이 갈릴 때에는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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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법칙에서 강조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기술적인 탁월함이 곧 도덕적 요건이라는 것을 평생 간과하고 살아왔다. 의도가 좋았으면 조금 부족해도 좋다는 식의 생각을 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생명이 오가는 수술대가 아닌 거의 대부분의 일에서도 실력은 도덕적 요건이며, 디테일은 언제나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 한 번 환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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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3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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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 정말 많이 와 닿았다. 내가 목표하는 것에 닿지 못하고, 완벽하지 못한 내 모습에 끝없이 실망하고 절망해왔다. 저자가 말하는 맥락과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내가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매일을 꾸준히 살아가다보면 분명히 그 거리가 좁혀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미래가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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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8 에마는 나의 옛 정체성을 되돌려주지는 않았다. 대신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내 능력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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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는 저자의 주치의로 치료과정과 약물 선택을 할 때 언제나 상의를 하고 결정했다. 저자가 치료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며 그것에 최대한 영향을 주지 않는 쪽으로 치료 방향을 잡았다.
이 부분을 보면서도 굉장히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지금까지의 인생을 위로하고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려는 내게 위의 문장은 정말 특별하게 다가왔다.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운 계획과 생각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때 나를 자꾸 괴롭히는 것이 있다. 과거의 나를 완전히 버리자는 유혹이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만들어가고 살아갈 인생도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완전히 빼놓고 갈 수는 없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더라도 과거의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나의 모습을 만들어 가야한다.
자꾸만 과거의 나를 부정하려는 생각들이 떠오는데, 그럴 때마다 이 구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나의 그런 모습들을 다 끌어안고 그 위에 새로운 정체성을 입히고 조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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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4 이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다. (...)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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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장 죽을 것도 아니고 (잠시 후에 죽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굉장히 쑥스럽기도 하지만, 나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매 순간 하고 싶다. 가끔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도 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도 많지만. 내가 지금 살아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다 덕분이라고.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이다.
# 죽음, 사는 만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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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2 그는 훌륭한 성품에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고, 죽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랬을 것이다. 그 대신에 폴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남들을 도우려 했고, 이는 그만이 남길 수 있는 업적이다. (...)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폴에게 주어진 삶이었고, 그는 그 삶으로부터 이 책을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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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작가는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사는 만큼 쓴다.” 라는 표현을 했다. 저자의 사후에 그의 아내가 쓴 에필로그 부분의 이 글은 유 작가님이 이야기한 사는 만큼 쓴다는 말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아들을 꿈꾸는 내게 발췌한 내용은 내가 죽은 이후 내가 평가되고 싶은 말이다.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을 거고, 그 과정이 정말 험난하겠지만 앞으론 흔들리지 않고 뚜벅뚜벅 내가 갈 길을 걸어 나가겠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게..
2019.08.05. (2019_110)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